"독립운동가 후손인 거 자랑해봤냐고? 뭐 하러 그런 말을···. 한국에선 그런 거 필요 없더라고."
독립운동가 김규식 장군의 후손인 중국교포 김용진(57)씨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종이컵에 반잔이나 채워진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미 시커멓게 타버렸을 속에서 쓴 소주가 뜨겁게 반응하는지 잠깐 인상을 찡그렸다. 잠시 침묵. 입을 연 김씨가 물었다.
"7년 만에 만난 아들을 단 이틀 함께 지내고 저 세상으로 보낸 부모 심정을 아나?"
김씨의 아들은 김군(27)씨. 김군씨는 지난 7일 경기도 이천시 냉동창고 '코리아2000' 화재 현장에서 사망했다. 아버지 김용진씨를 7년 만에 만난 지 딱 일주일 후에 변을 당한 것이다. 김씨를 8일 밤 10시 이천시 화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만났다.
김용진씨는 부인과 함께 지난 2000년 한국에 들어왔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아들 김군씨는 혼자 중국 장춘에 남았다. 아버지 김씨는 2005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리고 아들 김군씨를 초청했다. 김군씨는 지난 12월 31일 입국했다. 그는 아버지와 단 이틀을 보낸 뒤 지난 2일부터 숙식이 해결되는 '코리아2000' 현장에서 일했다.
"아들 잃은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김용진씨는 "아들을 7년 만에 만났으니 내가 얼마나 반가웠겠나"라며 일주일 전의 부자 상봉을 회상했다. 김씨는 "근데 이미 다 끝나버렸다, 하나 있던 아들의 시신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김씨는 의외로 차분했다.
"아들 잃은 심정,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쓸쓸하기 짝이 없다."
앞서 밝혔듯, 김씨는 독립운동가 후손이다. 그의 외증조부는 김규식 장군이다. 김규식 장군은 1920년 북로군정서를 조직했고,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김규식 장군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그리고 김씨의 외할아버지 김성로 역시 독립운동가다. 김성로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있으면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다가 1936년 일본군에 의해 사망했다. 1990년 조국은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헌정했다.
김용진씨는 이런 가족사를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김씨의 삶 역시 영광스러웠을까? 김씨는 독립운동가 후손 자격으로 1990년에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1990년 2월 22일 MBC 뉴스 백지연 앵커는 아래와 같은 소식을 전국에 전했다.
"김좌진, 이범석 장군과 함께 독립군인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청산리전투 등 항일 무장 투쟁에 큰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 고 김규식 장군의 유일한 친손자인 51살 김시준씨가 오늘 외조카 38살 김용진씨와 함께 중국에서 입국해 고국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이때 조국은 김씨 가족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줬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영광은 그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김씨는 2000년 다시 입국했다. 이번엔 독립운동가 후손이 아닌 몸 하나가 전부인 노동자 자격이었다. 그에게 꽃다발을 안기는 사람은 없었다.
"조상이 목숨 바쳐 찾은 조국에서 아들은 중국 국적으로 불에 타"
김씨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역할은 목수였다.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산업재해는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김씨는 2007년 10월 지하철 9호선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4층 높이에서 추락했다. 왼쪽 손목과 갈비뼈 9개가 부러졌다. 왼쪽 얼굴 광대뼈도 손상을 입었다.
김씨는 산재보상금 1800만원을 받고 일터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는 지금 사고 후유증으로 왼쪽 손을 쥘 수가 없다. 왼손을 쥘 수 없는 60세 가까운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김씨는 아직 찾지 못했다.
이렇게 산업재해로 고통받고 있는 그가, 이번엔 산업재해로 아들을 잃은 것이다. 김씨는 "이게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내 조상들이 목숨 바쳐 찾은 조국에서, 내 아들은 중국 국적으로 한국에서 불에 타 죽었다. 그리고 조국은 은근슬쩍 중국 노동자들에게 보상이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다 똑같은 사람 아닌가. 어떻게 보상을 달리 한다는 말을 할 수 있나. 참 쓸쓸하다. 내 아들 목숨을 차별하면 이번엔 참지 않을 것이다."
"똑같은 사람 아닌가, 목숨 차별 못 참아"
김씨의 집은 서울 구로동이다. 부인 장고분(56)씨와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 보증금은 50만원이고 월세가 22만원이다. 김씨는 "부인이 가끔 식당 같은 데 나가 돈을 벌어와 그것으로 먹고 산다"고 말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들어준 기자가 고마웠던 것일까, 아니면 말이라도 하니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김씨는 커피 한 잔 하자며 밖으로 기자를 이끌었다. 함께 걸으며 김씨에게 "한국이 원망스럽지 않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짧았다.
"원망 같은 거 없다. 조상덕으로 지금껏 조국에서 돈 벌어 먹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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